두봉 주교 선종 별세 사망 원인 프로필 나이
🙏 두봉 레나도 주교의 삶과 죽음, 70년 한국의 친구를 떠나보내며
가난한 자의 벗이자, 이 땅의 순례자였던 프랑스 신부님께 드리는 헌사
👶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방인’, 한국을 사랑한 진짜 한국인
1929년 5월 25일, 프랑스 오를레앙의 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르레 뒤퐁(René Dupont).
그는 3남 2녀 중 차남으로 자랐다. 🇫🇷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신앙과 공동체 봉사의 의미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그는, 청년이 된 후 신학교에 입학하고, 21세가 되던 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다.
이 선택은 곧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 그는 유럽이라는 익숙한 세계를 떠나, 전쟁 직후의 황폐한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파견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간다.
✝️ 로마에서의 수학과 사제품, 그리고 운명적 파견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한 그는,
1953년 6월, 마침내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1954년 12월, 두 손에 성경과 희망을 들고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다. ✈️
그는 대전교구로 배정되어 대흥동 천주교회 보좌신부로 부임하며,
10년 가까운 시간을 대전 지역 가난한 농민들과 노동자, 학생들 사이에서 보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한국말을 배우고, 습관처럼 사람들을 '형님', '아우'라 부르며 ‘프랑스인’이 아닌 ‘이웃’으로 다가갔다.
📖 대전교구 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 교구청 상서국장 등의 역할도 맡으며
그는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는 사제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실천가였다.
⛪ 1969년, ‘안동교구’ 첫 번째 주교로 임명되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서품된 그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초로 ‘안동’이라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교구를 이끄는 책임자가 된다.
🧭 안동은 당시만 해도 교세도 미약하고, 농촌 기반의 가난한 교구였다.
두봉 주교는 이 교구의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복음이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 이 한 마디는 그의 삶 전체를 압축한다.
그는 사치와 멀어졌고, 권위와도 거리를 뒀으며, 항상 마을 중심, 사람 중심, 삶 중심의 사목 활동을 지향했다.
💉 다미안 의원과 가톨릭농민회… 사회적 약자의 벗
안동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단순히 성당을 짓고 성사를 집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73년,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을 설립했다. 🏥
한센병은 그 당시 사회적 차별과 배척의 상징이었다.
두봉 주교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들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들과 밥을 먹고, 손을 맞잡고, 포옹하며, 함께 살아갔다.
또 1978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를 창립한다.
그는 산촌과 들판의 삶, 농민들의 권리와 존엄을 지키기 위한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
이때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땅을 지키라고 인간을 만드셨다.
돈보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복음이다.”
📜 한국 사회의 변화를 직접 체험한 ‘살아 있는 역사’
1954년에 한국에 도착한 이후,
두봉 주교는 휴전 직후의 폐허, 70~80년대의 압축성장기, IMF 위기,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도래까지 모두를 하나의 ‘삶의 현장’으로 경험했다. 🕰️
그는 2023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 시절 못사는 사람들은 서로가 잘 도왔어요.
내일 먹을 것이 없어도 이웃이 굶고 있으면 반을 나눠줬지요.
어려운 사람들은 웃을 줄 알았어요. 그게 한국의 힘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현대의 한국 사회에 대해 아쉬움도 토로했다.
“지금은 옛날보다 못해요.
너무 바쁘고, 서로 경쟁하고, 이웃을 돌아보지 않아요.”
그는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을 아파했던 것이다. 🥀
두봉 주교 선종 별세 사망 원인 프로필 나이
🇰🇷 2019년, 특별귀화로 ‘진짜 한국인’이 되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부여했다. 🇰🇷🇫🇷
두봉 주교는 이로써 프랑스-한국 이중국적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나는 마음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인이었습니다.
국적은 제게 큰 의미가 없어요.
내가 태어난 곳이 프랑스라면,
내가 살고, 사랑한 곳은 한국입니다.”
그의 말처럼, 그는 외국인이 아닌 진짜 한국의 신부님이었다.
그의 말투, 습관, 식사, 친구들, 삶의 방식까지
모두 한국이었다.
🕯️ 마지막까지 신자 곁에… 선종 직전까지 고해성사
노환과 지병이 있었음에도,
두봉 주교는 **의성의 한 공소(성당이 없는 지역의 작은 기도처)**에서
마지막까지 신자들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살아갔다.
📞 전화, 📧 이메일, 💌 편지,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그를 만나러 온 수많은 이들에게 일일이 답하고, 기도하고, 축복해주었다.
2022년에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이후 수백 통의 편지와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는 모두 읽고, 되도록이면 답을 주려고 애썼다. 💌유>
그는 단지 유명한 성직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귀 기울인 따뜻한 이웃이었다.
💔 2024년 4월 6일, 뇌경색으로 쓰러지다… 그리고 10일, 선종
2024년 4월 6일, 두봉 주교는
경북 안동병원에서 뇌경색으로 긴급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4월 10일 새벽, 향년 9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병상에서 신자들의 이름을 불렀고,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생을 마무리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죽음은 마치 조용히 촛불이 꺼지듯 담담했다. 🕯️
🌸 그가 떠난 자리, 남겨진 것들
그가 떠난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 그가 세운 다미안 의원과 농민회
- 그가 머물던 공소에서의 고해성사
- 그가 사랑한 한국의 산과 들, 사람들
- 그리고 그가 전한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
그는 말없이 실천했고,
말없이 떠났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는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의 삶에 묻어 있다.
그가 남긴 복음은,
더 이상 책 속에 있지 않다.
우리의 손과 발로 이어져야 할 사랑의 메시지로 존재한다.
🕊️ 마지막 인사: 고마웠습니다, 사랑했습니다
두봉 주교님,
긴 세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한국 땅을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난한 이를 끌어안고,
외로운 이를 위로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당신은 진짜 한국인이었고,
⛪ 당신은 진짜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
우리가 잊지 않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두봉 주교 선종 별세 사망 원인 프로필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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